45번국도 용인→광주 방면으로 이동하다 보면 포곡읍과 모현면 경계지점 우측에 세워진 비석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느껴지는 이 비석은 초부리 초현마을 입구 도로변에 꽤 오랜 시간 버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자세히 살펴보니 비석을 보호하고 있던 철제 울타리가 상당부분 파손된 상태입니다. 비석 또한 두 동강 난 것을 다시 붙여놓은 흔적이 있고요.

이대로 얼마나 방치돼 있었던 걸까. 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거리뷰’ 서비스를 통해 확인해 보니 2011년과 2013년 사이 울타리의 파손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리되지 않은 채 최소 3년이 흘렀다는 얘긴데요.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관심 속에 방치된 모습에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대체 누구의, 어떤 이유로 이곳에 세워진 비석인지 말이죠.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부터 들어봐야겠습니다.

“그거 군수비에요. 아마 100년도 더 됐을 걸요.”

초부2리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어르신들은 한목소리로 비석의 주인공이 군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인물이었고, 비석이 세워진 까닭을 아는 주민은 없었는데요. 다만 비석이 파손된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도로가에 있다 보니 차량이 충돌하면서 쪼개졌어요. 인근 석재업체에서 급하게 갈라진 부분을 실리콘접착제로 붙인 거예요.”

다행히 비석에 새겨진 한자는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름으로 추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앞면에는 세로로 ‘郡守玄公燦鳳 善政碑(군수현공찬봉 선정비)’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공(公)’은 주로 남자의 성이나 이름 뒤에 쓰이는 것으로, 그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요. 이를 감안해 읽으면 ‘군수 현찬봉 선정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찬봉 군수.

그렇습니다. 비석의 주인공은 현찬봉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선정비’란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관원의 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뜻하고요.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린 자의 공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했던 마을 주민들의 보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인물일까 더욱 궁금해졌는데요.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현찬봉’을 입력하자 그에 대한 정보가 나왔습니다.

두산백과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86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었습니다. 특히 1903년 용인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불망각이 세워지고 고을 백성들로부터 만인산을 받았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만인산(萬人傘)’은 고을 사람들이 지방관리의 공덕을 기리며 감사의 표시로 바친 비단 양산(일산)을 말하는데요. 만인산과 얽힌 이야기는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료에는 현찬봉 군수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도 소개돼 있는데, 사극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스토리입니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이 어릴 때 병이 생겨 전국의 유명한 의원들을 불렀지만, 모두 고치지 못한 것을 그가 완치시켰다는 겁니다. 현 군수는 10살 때 이미 시를 짓고 의학에 통달할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는데요.

이러한 공으로 벼슬에 오른 그는 수륜원 주사, 차비대령, 태의원전의, 승의랑 등을 역임한 뒤 1903년 용인군수로 임명됐다고 합니다.

용인군수 재임 시절의 이야기는 용인시민신문의 연재기사 ‘정양화의 용인역사 인물속으로’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핵심적인 부문만 추려봤는데요.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용인군수 현찬봉은 자신의 재산으로 빈민을 구휼하며, 향학을 권해 점차 백성의 지식이 발달하고, 세금을 걷는 데에도 불편함과 번잡함이 없어 기한 안에 조세를 바치지 못할 우려가 없도록 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 매일신보 1906년 4월 28일자 –

“근검하고 조리가 있으며 송사를 들으면 반드시 명확함을 따랐으며 백성들이 모두 원한다.” – 황성신문 1905년 8월 2일자에 게재된 현찬봉 군수의 치적 –

“현 군수는 이임할 때 지금의 이동면 주민들로부터 만인산을 받았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해도 만인산까지 받는 것은 드믄 예에 속한다. 비단으로 만들어 수를 놓아 칭송했으니 일생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또 선정을 찬송하는 목비가 곳곳에 세워졌다. 문집의 내용을 보면 어느 한곳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용인군 전체에 골고루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읍내를 비롯해 연원, 마가실, 방축동, 성밑, 초당곡, 구흥, 갈내, 아곡, 진목리, 샘골, 신원리, 왕림 등 39개소나 된다.”

용인문화원 정양화 부원장은 또 다른 글에서 “마을마다 목비가 서고 만인산과 불망각을 함께 받은 예를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결코 강압이나 타의가 아닌 용인고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 분명하다”고 했는데요.

또한 “읍내에 세워졌던 불망각도 사라졌고 군내 각처에 세워졌던 그 많은 목비들도 이제는 흔적도 없다”며 “초부리에 세워진 공의 공적비만이 길가에 남아 말없이 100년 전의 옛 얘기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라고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애민정신을 실천하고 백성들에게 존경받은 리더 현찬봉 군수. 오늘날의 공직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요. 용인에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유적이 모두의 무관심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는 사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양화 부원장은 미디어모현과의 통화에서 “관리하는 사람 없이 이대로 도로가에 두면 소실될 위험이 크다”며 “지금이라도 시 차원에서 면사무소나 마을회관 앞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선정비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충분히 가치 있는 향토유적이라 할 수 있는데요. 하루 빨리 적합한 장소로 이전돼 지속적인 관리가 이뤄지길 기대해봅니다. 그것이 현찬봉 군수가 용인에서 펼친 선정을 기억하고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